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바스 왕조/역사 (문단 편집) === [[알 나시르]](1180 ~ 1225) === [[알 나시르]]는 아바스 칼리파조의 황금기를 재현하겠다는 야망에 가득찬 인물이었다. 그는 먼저 지지세력을 최대한 끌어모으고자 했다. 당시 이라크와 이란 일대에는 '푸투와'(futuwwa)가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이들은 종교 결사의 형태로 여러 도시에 자리를 잡고, 서로 연계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알 나시르는 이들을 활용하여 아바스 칼리파조의 부흥을 이끌기로 마음먹었다. 1182/1183년, 바그다드의 푸투와 지도자이자 라하시야 가문의 장로인 라하시야는 알 나시르에게 "푸투와 로브"를 입혔다. 그 직후, 알 나시르는 자신을 모든 푸투와의 우두머리라고 선언했다. 이후 울라마, 군인, 고급관료 등이 푸투와에 귀속되어 친목을 두텁게 다지고, 아바스 칼리파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182년 11월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 딘]]이 모술을 포위했다. 알 나시르는 살라흐 앗 딘이 이라크의 지척인 모술까지 공략하면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해 모술을 구하고자 북상했다. 이와 동시에 [[셀주크 제국]]의 [[토그릴 3세]]도 군대를 이끌고 모술로 남하했다. 살라흐 앗 딘은 이슬람교의 수장인 아바스 칼리파와 대적할 수는 없다고 판단해 철수했다. 1183년에서 1184년, 알 나시르는 [[키르쿠크]] 남쪽의 다쿠르를 공략했다. 1186년, 살라흐 앗 딘이 모술의 복종을 받아내면서 레반트 일대의 이슬람 지역을 통합했다. 그 후 1187년 살라흐 앗 딘이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뒤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을 공략했다. 이리하여 [[메카]], [[메디나]]에 이은 이슬람 제3의 성도가 한 세기 만에 아바스 칼리파 알 나시르의 이름하에 수복되었다. 한편, 1186년 이란 동부의 케르만에 있었던 [[셀주크 제국]]이 [[오우즈]] 튀르크의 침공으로 붕괴되고, 무함마드 이븐 바흐람 샤가 도주했다. 이제 셀주크 제국의 영역은 이란 서부로 한정되었으나, 그마저도 토그릴 3세와 [[키질 아르슬란]] 사이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웠다. 토그릴 3세는 [[바반드 왕조]]의 후삼 앗 다울라 등 왕공들의 지원에 힘입어 맘루크와 마라가, 젠잔 에미르들의 지원을 받은 키질 아르슬란을 수도 [[하마단]]에서 몰아냈다. 키질 아르슬란은 북부 산악지대로 도주한 뒤, 11월 7일 아잠을 떠나 아제르바이잔으로 향한 후 바그다드에 사절을 보내 셀주크 술탄의 커져가는 힘을 경고하며 칼리파에 복속하는 대가로 지원군을 청했다. 아잠 일대를 장악한 토그릴 3세 역시 사절을 보내와 자신을 술탄으로 책봉하고 자신이 거주할 바그다드의 다르 알 술탄(술탄 궁전)을 보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알 나시르는 키질 아르슬란과 토그릴 3세 중 어느 쪽을 선택할 지를 고심한 끝에 술탄 궁전을 흔적도 없이 밀어버리며 노선을 확실히 했다. 이후 60만 디나르를 들여 군대를 대대적으로 편성해, 1158년 15,000명의 기병대를 확보했다. 그해 4월, 알 나시르는 [[와지르]] 잘랄 앗 딘 우바이둘라 이븐 유누스를 사령관으로 세우고 토그릴 3세 토벌 임무를 맡겼다. 유누스는 키질 아르슬란과의 합류도 기다리지 않은채 곧바로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하마단을 향해 진군했다. 그러던 1188년 5월 5일, 토그릴 3세의 군대와 다이마르그에서에서 마주치자 곧바로 공격했다. 그러나 족장 마흐무드 바르잠 알 이바이 휘하의 튀르크멘 병력이 셀주크 술탄 진영으로 배신하는 바람에 아바스 칼리파군은 패배했고, 유누스는 사로잡혔다. 하지만 알 나시르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이라크 전역에서 긁어모은 세금으로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여 1188년 7월 재차 출진했다. 이때 토그릴 3세는 휘하의 주요 아미르들 중 아이바와 오자다 등을 처형했다. 이 행위에 부하들은 동요했고, 앞서 전향했던 쿠틀루그 이난즈가 재차 토그릴 3세의 진영을 떠나 키질 아르슬란 편에 가담했다. 키질 아르슬란은 1년만에 아잠으로 귀환했고, 이번에는 아바스 칼리파 군대도 약속한 장소에서 합류했다. 연합군은 어렵지 않게 하마단을 점령했고, 토그릴 3세의 5촌 당숙인 산자르 이븐 쉴레이만 샤를 셀주크 술탄으로 추대했다. 토그릴 3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잠을 포기하고 아제르바이잔으로 향했다. 그는 튀르크멘 영주 이즈 앗 딘 하산 이븐 킵차크의 성채에 피신한 뒤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 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살라흐 앗 딘은 안티오크 공국 원정 도중 군대가 지쳐 후퇴하던 터라 여유가 없어서 응하지 않았다. 알 나시르는 여세를 몰아 [[티크리트]]에 대한 지배권을 수복했다. 이렇듯 아바스 왕조가 강성해지자, 1189년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이 아바스 칼리파에 대한 예배를 하도록 허용함으로써 그들과 친선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토그릴 3세는 마지막 시도로 키질 아르슬란과 알 나시르에게 사절을 보냈다. 특히 알 나시르에겐 아들 알프 아르슬란과 함께 사절단을 바그다드로 파견해 자신을 대신해 사과하게 하고, 이븐 유누스에게 가한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했으며, 칼리파의 명령을 존중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키질 아르슬란과 알 나시르 둘 다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결국 1190년 10월 토그릴 3세는 킵차크 성채에서 2년간의 포위 공격을 견딘 끝에 키질 아르슬란에게 항복했다. 그 후 그는 아들 알프 아르슬란과 함께 타브리즈 인근의 카흐란 성채에 구금되었다. 이제 거칠 것이 없어진 키질 아르슬란은 알 나시르의 동의하에 술탄 산자르를 폐위하고 형수 이나츠 카툰과 결혼한 후 하마단에서 자신을 셀주크 술탄으로 선포했다. 이리하여 동맹이 아잠 일대를 통치하게 됨으로써 북방 전선이 안정되자, 알 나시르는 유프라테스 강 중류의 하디싸와 아나를 공략하는 등 세력 확장을 꾀했다. 그런데 1191년 8/9월, 키질 아르슬란이 암살당했다. 키질 아르슬란 사후 그의 네 조카인 아부 바크르, 오즈베그, 쿠틀루그 이난즈, 아미르 아미란이 골육상쟁을 벌였다. 셀주크 내전은 1195년 누스라트 앗 딘 아부 바크르가 아제르바이잔을 석권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1192년 5월에 자한 팔라반의 맘루크 마흐무드 아나스 오글루에 의해 유배지에서 풀려난 토그릴 3세는 아부 바크르의 추격병들을 따돌리고 재차 튀르크멘들을 포섭하여 군대를 편성했다. 이후 동쪽으로 진군하여 그해 6월 22일, [[카즈빈]] 부근에서 쿠틀루그 이난즈와 아미르 아미란 형제를 격파한 뒤 하마단에 입성하고 셀주크 술탄에 복위했다. 아잠에서 축출된 쿠틀루그 & 아미란 형제는 아제르바이잔의 아부 바크르에게 도전했으나 이 역시 패배하자 각자 라이와 시르반으로 도주했다. 그 중 라이로 도주한 쿠틀루그는 [[호라즘 왕조]]의 테키쉬에게 도움을 청했다. 테키쉬는 세력을 확장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호라즘 군대를 이끌고 라이로 진군했다. 그리고는 쿠틀루그를 쫓아내고 라이를 장악했다. 셀주크의 토그릴 3세가 호라즘 왕조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군대를 준비하자, 테크쉬는 협상을 제안했다. 토그릴 3세 역시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호라즘 왕조와 전쟁을 벌이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딸을 호라즘 왕자 유누스 칸과 약혼시켰다. 하지만 테키쉬가 동생 술탄 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잠의 세금을 거둔 후 회군하자, 토그릴 3세는 준비한 군대를 이끌고 출진해 1193년 3월 호라즘 왕조의 라이 총독 탐가치를 죽이고 라이를 공략했다. 테크쉬는 결혼동맹을 맺기로 해놓고 뒤통수를 날린 셀주크의 토그릴 3세에게 분노해 복수를 꾀했다. 토그릴 3세는 테크쉬의 임박한 반격에 대비해 쿠틀루그와 화해하고 그의 모친 이나츠 카툰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나츠 카툰이 자신을 독살하려 한 정황이 드러나자 그녀를 살해했다. 쿠틀루그는 잔잔으로 도주한 뒤 호라즘의 테크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 시기에 아바스 칼리파 알 나시르 역시 테크쉬에게 사절을 보내 셀주크의 토그릴 3세를 응징해달라고 요청했다. 테크쉬는 일단 7,000명의 호라즘 병력을 파견해 쿠틀루그를 지원하게 했다. 1194년, 토그릴 3세는 쿠틀루그를 공격해 단숨에 물리쳤다. 쿠틀루그는 셈닌으로 도주해 호라즘군 본대와 합류했다. 한편 호라즘 측의 '하집'(관료) 시하브 앗 딘 마수드가 테키쉬의 아들을 술탄 휘하의 라이 총독으로 임명한 뒤 토그릴 3세에게 휴전 협상을 제안하며 우선 [[사베흐]]로 철수하라고 권고했다. 토그릴 3세는 아미르들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는데, 화의를 수용하거나 최소한 잔잔과 이스파한의 지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다수의 의견을 묵살하고 전투를 결심했다. 이는 쿠틀루그 이난즈로부터 전투 때 호라즘군을 배신하고 그 편에 들겠다는 서신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토그릴 3세는 라이로 향한 뒤 전투가 임박한 상황에서도 승리를 확신하며 궁전에서 유희를 즐겼다. 1194년 3월 19일, 테키쉬의 호라즘 대군이 모습을 보이자 토그릴 3세는 농성 대신 셀주크 군대를 이끌고 회전에 나섰다. 술탄 토그릴 3세는 별다른 작전도 없이 호라즘군의 선발대 중앙부를 향해 돌격했다. 그러나 이미 전세를 직감한 아미르들은 요지부동이었고, 오직 60명의 근위대만이 술탄의 무모한 돌격에 함께했다. 짧은 전투 끝에 토그릴 3세는 눈에 부상을 입고 낙마했고, 그와 악연을 이어가던 쿠틀루그 이난즈가 나서 목숨을 애걸하는 술탄을 참수했다. 이리하여 셀주크 제국은 멸망했고, 토그릴 3세의 수급은 바그다드에 보내졌다. 알 나시르는 이를 궁전 앞의 누비 성문에 메달아 과거 셀주크 술탄들에게 핍박받았던 선대 칼리파들의 넋을 기렸다. 호라즘 왕조는 셀주크 제국을 무너뜨리면서 [[하마단]]에서 [[메르브]]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알 나시르는 아바스 칼리파조를 오랜 세월 핍박한 셀주크 제국을 무너뜨린 호라즘샤 테키쉬를 치하하면서 아잠 지역의 전체 혹은 일부를 환원하라고 요구했으나 무시당했다. 급기야 테키쉬는 칼리파의 승인없이 기존의 호라즘샤 칭호 대신 술탄을 칭하며 위세를 드러냈다. 알 나시르는 와지르 무아야드 앗 딘 이븐 알 카사브에게 예복을 주고 군대와 함께 이란으로 파견했다. 이븐 알 카사브는 테키쉬에게 바그다드로 와서 칼리파에게 복종을 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테키쉬가 자신을 치려 들자, 카사브는 바그다드로 도주했다. 알 나시르는 바그다드로 돌아온 앗 카사브에게 와지르의 예복을 내리며 칼리파의 권위를 세워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이후 알 나시르는 알 카사브에게 군대를 주어 이븐 샤믈라가 사망한 뒤 혼란에 빠져있었던 [[후제스탄]]을 공략하게 했다. 아바스군은 별 어려움 없이 후제스탄 일대를 평정했다. 이후 카사브가 아잠으로 진군하자, 셀주크 술탄 토그릴 3세를 배신한 공으로 호라즘 왕조의 아잠 총독으로 봉해진 쿠틀루그 이난즈가 재차 배신하여 아바스 칼리파 측으로 전향했다. 미산에서 합류한 둘은 진군을 계속하여 [[케르만샤]]와 [[하마단]]을 점령했고, 테키쉬의 아들과 그가 이끌던 수비대를 사로잡았다. 이란 서부를 평정한 이븐 알 카사브는 동진하여 라이를 점령했고, 비슷한 시기 [[이스파한]]의 유력자들의 요청으로 알 나시르가 파견한 별동대가 일대를 장악했다. 이로써 아잠과 지발 지역은 약 200년만에 아바스 칼리파조의 영토로 돌아왔다. 이렇듯 원정이 수월하게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이란인들이 호라즘 세력을 이방인 혹은 야만인으로 여기고 칼리파군에 열렬한 호응을 해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크쉬는 자신을 셀주크 제국의 후예로 여기고 이란 전체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기에 그리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의례적으로 알 칼사브에게 철수를 요구한 후, 예상대로 거절당하자 호라즘군을 이끌고 진군했다. 그런데 알 나시르에겐 불행하게도, 1196년 7월 원정군 사령관 이븐 알 카사브가 하마단에서 급사했다. 졸지에 지휘관을 잃은 칼리파군은 마단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퇴했고, 테키쉬는 하마단에 입성한 뒤 얼마 동안 머무른 후 본진인 호라산으로 귀환했다. 1197년 알 나시르는 재차 하마단 공략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1198년 아잠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테키쉬는 알 나시르에게 쿠트바(금요 예배문)에서 자신을 술탄으로 언급하라고 요구했으며, 더 나아가 바그다드에 대한 세속 지배권까지 청구했다. 알 나시르는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신흥 강국인 [[구르 왕조]]의 술탄 기야스 웃딘 무함마드에게 동맹을 제시하여, 테키쉬의 아바스 칼리파 영토 침범을 저지하도록 했다. 기야스 웃딘 무함마드는 이를 수락하고 호라산 남부로 진격해 [[카라 키타이]]-호라즘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 일대를 평정했다. 이에 테키쉬가 협상을 청하자, 기야스 웃딘은 아바스 칼리파에 대한 복종을 요구했다. 테키쉬는 이를 받아들이고 칼리파 알 나시르에게 용서를 구했다. 알 나시르는 호라즘 왕조가 충분히 약해졌고, 구르 왕조가 지나치게 크는 것 역시 원하지 않았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1198년 알 나시르는 선물과 함께 이라크 아잠(이란 서부), 호라산, 투르키스탄의 술탄으로써 예복을 보냈고, 테키쉬는 바그다드에 대한 지배권이나 쿠트바 언급 요구를 철회하고, 아바스 칼리파에 명목상 복속했다. 그후 아바스 왕조와 호라즘 왕조는 평화를 유지했지만 1200년 7월 테키쉬가 승하하고, 새 술탄 [[알라 웃 딘 무함마드]]가 등극한 뒤 [[시아파]] 칼리파를 옹립하고 바그다드를 위협하면서 또다시 갈등이 일어났다. 알 나시르는 이에 분노했지만 무함마드가 주변 일대를 모조리 평정하는 등 왕성한 군사 활동을 벌이는 상황이었기에 함부로 적대하지 못했고, 단지 호라즘에서 바그다드를 거쳐 메카로 순례하는 이들을 박대하는 정도에 그쳤다. 1217년, 무함마드는 [[시르다리야 강|자카르테스 강]]에서 걸프 만까지 이르는 일대를 평정한 뒤 자신을 '샤'라고 선언하고 칼리파 알 나시르에게 공식적인 인정을 요구했다. 그가 거부하자, 무함마드는 호라즘 군대를 모아 칼리파를 폐위시키기 위해 바그다드로 진격했다. 그러나 자그로스 산맥을 건널 때 눈보라를 만나는 바람에 수천 명의 동사자가 발생하자 어쩔 수 없이 철군했다. 1219년 [[아이유브 왕조]]의 신임 술탄 [[알 카밀]]이 이집트로 쳐들어온 제5차 십자군에 맞서기 위해 칼리파 알 나시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알 나시르는 [[지하드]]를 선포하며 대규모의 지원군을 약속했다. 하지만 얼마 후 제5차 십자군이 궤멸되면서, 실제로 파견되지는 않았다. 1220년 [[칭기즈 칸]]이 15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 왕조로 쳐들어가면서 [[몽골-호라즘 전쟁]]이 발발했다. 3년 전에 자신을 폐위시키기 위해 쳐들어왔다가 눈보라에 막혀 돌아갔던 무함마드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던 알 나시르는 몽골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 대신 이단자를 심판해줘서 고맙다며 막대한 선물을 안겼다. 이후 호라즘 왕조는 몽골에게 잔혹하게 정복되었고, 몽골 제국과 아바스 칼리파조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파일:Al-_Saray_Mosque_جامع_السراي.jpg]] 무스탄시리야와 함께 바그다드의 몇 안되는 아바스 시대 건축물인 앗 사라이 모스크(1193년 건립) 알 나시르는 아바스 왕조의 제2차 중흥기를 이룩한 [[명군]]이었다. 그는 45년에 이르는 긴 치세 동안 쿠르드 지방을 제외한 현 이라크 일대와 후제스탄을 공략하여 아바스 왕조의 영역을 930년대 이후 최대로 넓혔으며, 내치를 훌륭하게 다져 이라크와 바그다드가 9세기 이후 유례없는 평화를 누리도록 했다. 그가 1225년에 붕어한 후에도 그가 이룩한 업적은 고스란히 이어졌고, 아바스 칼리파의 위상은 상당히 높아졌다. 제37대 칼리파 [[알 무스타심]]은 1242년 이집트의 술탄에 오른 [[샤자르 앗 두르]]가 여자인 점을 문제삼아 인정하지 않으면서, >"너희가 술탄이 될 남자를 찾지 못한다면 내가 한 사람을 보내겠다." 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이집트의 맘루크 에미르들이 권고를 따르지 않았지만,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할 정도로 아바스 칼리파의 권위는 강력해졌다. '''그러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